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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발길따라~

축서사(봉화) .... 2017.08.20

by 마루금 2017. 8. 20.

 

 

하산길에 들렀다. 봉화의 진산 문수산이 품고 있는 천년고찰 축서사 ~

사찰의 입지가 감탄하리만큼 천혜의 명당터라는 걸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응향각 ~

 

보광전 ~

 

 

보물 제995호 : 석조비로자나불상 & 목조광배 ~

 

 

문화재자료 제158호 : 석등 ~

 

석등 높이는 2.3m, 원래 석탑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웅전 앞으로 옮겨졌다. 맷돌, 주춧돌, 석축 등 석재들이 사찰 주변에 널리 흩어져 축서사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간지주 ~

 

 

대웅전 ~

 

대웅전 문짝 꽃무늬 ~

 

대웅전 내부에 있는 후불탱화 ~

 

보물 1739호 : 괘불탱화(실물은 못봤다. 사진은 축서사 홈피에서 빌린 것)  ~

 

 

문화재자료 제157호 : 삼층석탑(실물은 못봤다. 사진은 축서사 홈피에서 빌린 것) ~

 

▲ 삼층석탑 ~
이 석탑(石塔)은 선방 앞에 위치하고 있다. 하층 기단과 3층 옥개석(屋蓋石) 이상이 없어졌으나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의 뛰어난 모습을 남기고 있다. 하층 기단부(基壇部)는 갑석(甲石)만이 원 위치에 남아 있으며, 하대갑석(下臺甲石) 밑에도 잘 다듬어진 기단 면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탑을 둘러싸고 있으나 모두 이 탑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3층 기단은 면석이 한 돌로 되어있으며, 가운데 탱주를 하나씩 양각하였다. 옥신석은 사방에 우주만 새기고 탱주는 없다. 1층 옥개석과 2층 옥개석도 한 돌로 되어있으며, 2층 옥신석은 1층에 비해 높이가 매우 낮은 편이다.

 

 


사리보탑 ~2005년 9월 20일에 축서사 대웅전 계단 아래 심검당과 선열당 사이에 건립되었다.진신사리 112과를 모신 5층 석탑으로 탑 모양은 5층 아(亞)자형 한옥식,  기단 길이 7.3m, 높이 15.5m, 조성자는 충남 논산 광성면 왕전리 자광불교연구소 김광열씨이다. 각 층마다 한옥 모양의 조각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으며, 지붕은 기와 용마루, 벽에는 기둥, 포, 상하방 등이 부조되고, 각 층마다 부처님을 조각하여 53분이 조성되어 있다.

 

 

 

 

선열당 ~

 

심검당(좌) ~

 

보탑성전 ~

 


▼ 마침 구름이 벗겨지고 있었다.축서사 뒤로 서서히 자태를 드러내고 있는 문수산 ~배경의 산세와 고찰의 구조가 흠잡을 데 없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이다 ~

 

 

범종각 ~

 

안양원(좌), 강의동(정면), 심검당(우)

 

 

 

보탑성전 밑 ~

 

보탑성전 밑 쉼터 ~

 

 


문수산은 한 때 수많은 사찰과 전설이 풍성했던 명산이다. 동쪽은 태백산에서 연이은 낙동정맥, 서쪽에는 소백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다. 남쪽은 청량산(淸涼山)이 우뚝 서있고, 안산으로는 화산(華山)이 침착하게 서있다.

 

 

 

 

 

 

축서사(鷲棲寺) ~
독수리 축(鷲),깃들서(棲),즉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 보살님을 뜻한다. 또 다른 가설로 험준한 뒤쪽 산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의 형국이므로 축서라 명명했다고 보는 이도있다. 축서사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673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절의 스님이 어느날 밤 지금의 개단 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한 빛이 발산되고 있어 광체가 나는 곳으로 달러갔더니 한 동자가 아주 잘 조성된 불상앞에서 절을 하고 있었다. 얼마후 그 동자는 청량산 문수보살이라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다니다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축서사의 창건이다 이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해서 무수산이라 한듯하다. 3년 뒤에 의상대사께서는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이다.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있다.


대웅전 상량문에 의하면 이 절은 광서(光緖)7년(서기 1875년)에만 해도 대웅전,보광전,약사전,선승당,동별당,서별당,청련당,백화당,범종각등 여러동의 건물이 있었고, 산내 암자만도 상대,도솔암,천수암등 세 개나 되었고 대중이 44명이 살았으며 대웅전 본존불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였으나, 조선조 말기 을사보호조약(서기1905년)과 정미7조약(서기1907년)으로 왜구의 속국화되는 것을 분개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무장봉기하여 항일투쟁할 때 이 곳에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으로 방화하여 대웅전 1동만 남기고 전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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