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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진 북한산의 산장들 ~ 1983년 4월에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 78.5㎢가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2001년 10월에 환경부에서 고시한 2003년까지 전국 국립공원 내 대피소 12곳을 단계적으로 철거하겠다는 계획이 세워졌고, 그 일환으로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 있던 산꾼들의 숱한 애환이 담긴 4곳의 산장들이 하나 둘씩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나마 현재까지 남아서 명맥을 유지해오던 백운산장마저도 곧 존폐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이다. 북한산장, 인수산장, 우이산장은 이미 추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돌집으로 지어진 산장은 목적에 따라서 A형 B형 C형으로 등급을 두었는데, A형은 30평으로 전화와 관리인을 두었고, B형은 17평으로 악천후를 피하는 무인산장으로, C형은 B형보다 규모가 작은 무인산장이다. 그.. 2017. 11. 16.
도봉산 낭만길에서 ~ 2012. 12. 27.
내가 사용했던 막영장구들 ~ 내가 사용했던 막영장구들이다. 최신 것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물건들이지만 여기에는 내 아련한 추억이 담겨 있고, 내 젊은 시절의 손자국이 묻어있다. 사진을 찍어두지 못해 기록을 남기지 못한 물건들도 있지만, 이마저 남은 것만도 다행으로 여긴다. 1970년대, A형 & 가옥형 텐트 ~ 돔형 텐트는 2동을 사용했다. 작은 것은 2인용으로, 큰 것은 4~5인용으로 준비했다. 혼자 야영 들 때는 작은 것을 사용했고, 사람 수에 따라서 큰 것 하나만 아니면 2동을 모두 사용하기도 했다. 가족 단위로 움직이면 큰 텐트가 좋겠지만 가끔 혼자 다닐 때도 있어 일부러 2동을 구입했다. 텐트 2동을 사용했을 때의 단점으로는 텐트를 설치하는 시간이 배로 든다는 것이다, 대신 넓은 터가 필요치 않아서 야영지 선택에는 .. 2010. 7. 1.
가족과 함께 등반했던 시간들 ~ 내 사랑의 날들아 지은이 : 영숙 내 사랑의 날들아 내 가슴에 남아 / 떠나가지 마라 잊혀지지도 벗겨지지도 / 씻겨 내려가지도 마라 (1985년) 송도 청량산에서 ~ 너를 내 가슴에 새겨두고 녹슬지 않도록 닦고 닦아 / 찬란한 빛을 내고 싶다 우리 사랑의 깊이만큼 / 내 몸 깊숙한 속살까지 / 내 몸 골격 뼈까지 / 아파도 좋다 (1985년)집에서 ~ 간이 저리도록 그리운 것이 있어야 / 사랑하는 맛이 난다 발이 부르트도록 기다림이 있어야 / 살아가는 맛이 난다 되새겨보아도 좋을 것이 있어야 / 여운이 있다 (1989년)불암산에서 ~ 나는 그대 사랑으로만 살아가고 싶다 내 사랑을 남기고 싶다 내피를 물감처럼 풀어 / 내 사랑을 그리고 싶다 (1988년)불암산에서 ~ 우리가 저지른 사랑은 / 때로는 슬퍼도.. 2010. 6. 10.
내가 입었던 등산복(1990년대 초반) 1991년 ~ 클라이밍 바지를 처음으로 구입했다. 등산장비점에서도 본격적으로 클라이밍복을 취급해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구입한 클라이밍 바지는 츄리닝복 스타일이다. 1980년대 중반, 동생과 내가 싸이클복을 개조해서 입고 다녔던 복장과 같은 모양이다. 따라서 당시 동생과 내가 함께 입고 다녔던 노란색 옷이 결국은 클라이밍 바지의 모태가 되었고, 실질적 원조격인 셈이다. 츄리닝 스타일의 클라이밍 바지가 판매되기 직전까지는 타이즈가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츄리닝 스타일의 클라이밍복이 신개념으로 등장하면서 클라이밍용 타이즈는 점차 쇠퇴기를 맞았다. 신체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타이즈는 등반 외에 입고 다니기에는 곤란했지만 츄리닝 스타일의 클라이밍 바지는 그런 점이 해소되었다. 국내 첫 출시되었던 .. 2010. 6. 9.
내가 입었던 등산복(1980년대 중후반) 1986년 ~ 노란색 싸이클복을 구입했다. 개조해서 클라이밍복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당시 클라이밍복이라는 게 따로 없었다. 등산장비점에서 '클라이밍복'이란 명목으로 판매하는 옷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일부 클라이머들은 그 나름대로 옷을 개조하거나 직접 제작해서 클라이밍복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오봉에서(1987년) ~◈ 싸이클복을 '클라이밍복'으로 선택하게 된 이유는 이렇다. ◈ 신축성이 좋다는 점 . . . 무릎 구부림이 자연스러워 등반 시 복장에 의한 불편이 거의 없었다. ◈ 경제적이라는 것. . . . 가격이 저렴해서 옷이 헤지더라도 교체하는데 별 부담이 없었다. 천이 질겨서 예상보다는 오래 입을 수 있었다. ◈ 몸매를 살릴 수 있었다는 점 . . . 일반 등산복에 비해 몸에 잘 달라붙어서 날.. 2010. 6. 9.
내가 입었던 등산복(1980년대 중후반) 1985년에 우모복을 구입했다. 그전에 입던 것은 방수가 되지않아서 불편했고, 새로 구입한 것은 방수투습재의 하이포라 원단에 보온재는 덕다운으로, 구입가격은 장비점에서 특가로 56,000원, 당시 백화점 판매가격이 15만~20만원선이었다. 이 우모복을 입고서 산행을 한 적은 딱 한 번뿐이다. 그마저도 산행내내 입었던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입어본 것이다. 동계시즌 야영이나 야간산행이 아니면 굳이 이런 우모복까지 갖출 필요는 없다. 이 우모복으로 산행보다는 대부분 일상복으로 입고 다녔다. 혹한기에 발생할지 모를 악천후 대비로 가끔 준비해서 다닌 적은 있었다. 우모복의 특징이라면 단연 보온성이 뛰어난 점, 또한 그 부피에 비해 가볍다는 것이다. 당시의 하이포라 원단은 코오롱에서 국내 최초로 개발한 신소재였다.. 2010. 6. 9.
내가 입었던 등산복(1980년대 중후반) 1985년경에 오버트라우져를 장만했다. 추위에 대비한 방수방풍 기능의 등산복이다. 나일론 소재로서 '써미트' 브랜드로 출시된 최초의 디자인이며, 장점으로는 부피가 적고 매우 질기며 탈착용이 신속하다는 것. 당시 가격은 25,000원. 청계5가의 동진레져(당시 쟈이안트)에서 구입.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탈색만 되었을뿐 아직도 닳지는 않았다. 많은 산행에 걸쳐서 오버트라우져의 혜택을 오랫동안 누렸다. 동계시즌에 사용한 것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하계시즌에도 상황에 따라 지참해서 다녔다. 겨울철 상의(上依) 복장으로 울셔츠에 울스웨트를 겹쳐 입으면 이것만으로 보온이 충분했다. 그러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대면 이 복장만으로는 보온이 떨어져서 방풍 목적으로 오버트라우져를 덧입었다. 겨울철 하의(下依) 복장으로.. 2010. 6. 5.
내가 입었던 등산복(1980년대 중반) 반바지 차림에 스포츠양말과 운동화를 신고 등산용 수건을 말아서 머리띠로 둘렀다. 이것이 1980년대 중반의 대표적인 하계복장이었다. ++++++++++++++++++++++++++++++++++++++++++++++++++++++++++++ 당시 바위를 오르던 클라이머들의 모습이 이랬다. 워킹산행으로서는 이치에 어긋나지만, 바위꾼들만의 유행이었고 멋이었다. 그 시절 ... 주일이면 산으로 갔지만, 평일에는 아침마다 테니스장으로 갔다. 그렇게 7년간 테니스와 등반을 함께 병행했다. ++++++++++++++++++++++++++++++++++++++++++++++++++++++++++++ 어떤 날은 주일 아침에 테니스장으로 간적도 있다. 게임을 마치고나서 또 산으로 직행하면 테니스복이 곧 등산복이었으니, .. 2010. 5. 25.
내가 입었던 등산복(1980년대 초중반) 설악 흑범길에서(1983년) ~ 1982년에 니카바지를 또 장만했다. 먼저 장만했던 바지는 겨울용이라 여름철 등반용으로 부적합했다. 새로 장만한 니카바지는 모양도 더욱 세련되었고, 활동성이 좋은데다가 색상까지 마음에 들었다. 당시 위킹을 위주로 하던 산꾼들은 니카바지를 입고 산행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굳이 니카바지를 입지 않고서도 걷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 장비점에서 그런 복장을 팔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바윗꾼들은 달랐다. 암벽등반 때 대부분 츄리닝이나 니카바지 차림으로 바위를 올랐다. 등반 특성상 무릎구부림이 원활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복장을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니카바지는 활동이 편하다는 잇점도 있지만, 그 자체가 등산복 패션이라 워킹으로 이동할 때도 옷을 .. 2010. 5. 19.
내가 입었던 등산복(1980년대 초반) 1981년에 겨울용으로 니카바지와 우모복을 장만했다. 니카바지는 울(양털)로 짠 천인데, 보온성이 매우 탁월했으며, 당시의 동계용 의복으로서는 그만한 게 없었다. 단지 흠이라면 가격이 비싸고, 천이 좀 두꺼워서 뻑뻑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상의 복장으로는 셔츠 위에다가 울스웨터를 덧입었다. 더 추울 때는 겉옷으로 우모복을 입었고, 등반 중에 땀이 베어나면 겉옷을 벗었다. 우모복은 보온 재료가 오리털인데 당시 겉옷감이 방수가 되지 않아서 오리털이 심심찮게 밖으로 삐져나왔다. 니카바지를 그 때 처음으로 입었는데 느낌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일반 바지와 달리 무릎부분에 찍찍이가 있어 바지자락 폭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무릎을 많이 구부리는 행동을 취할 때는 찍찍이로 바지자락 폭을 늘려서 활동이 편.. 2010. 5. 19.
내가 입었던 등산복(1980년대 초반) 1980년대 초 (밀양 백운산) 1980년대 초에는 바위꾼들을 위한 클라이밍복이란 게 따로 없었다. 그저 워킹할 때의 옷차림을 그대로 입고서 바위를 올랐다. 워킹용 바지에다 적당한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서 .... 1980년대 초 (불암산) 암벽등반이라는 것이 생명을 담보로 해서 바위를 오르는 행위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민감해진다. 따라서 등산복장도 등반행위에 있어서 예외가 될 수가 없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특히 무릎이 잘 구부러져야하는데 당시의 복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청바지보다는 골덴바지가 더 부드러워서 무릎을 구부리기에 더 유리했다. 그러나 골덴바지도 무릎을 구부리는 행위는 여전히 불편했다. 촌스럽지만 당시에는 최상의 등산복장이었다. 1980년대 초 (불암산) 저 시절에 경주용 자전거를 마.. 2010. 5. 14.
내가 입었던 등산복(1980년대 초반) 1970년대까지 등산복이라는 게 일정한 패턴이 없었다. 주로 청바지에 상의는 일상에서 입던 옷을 아무렇게나 대충 걸쳐서 다녔다. 기능성을 따지거나 패션화 될만큼 당시의 산악문화도 발달되지 못했고, 주변 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또한 당시의 등산인구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빡빡한 소득으로 먹고 살기조차 바빠서 그야말로 문화생활을 누릴만한 여유들이 없었고, 산을 찿는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을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따라서 산에 여간 미쳐있지 않거나 생활에 여유가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산을 찿기가 그리 쉽지 않던 시절이다. 산에 가기 위해 니꾸사꾸(베낭을 당시 그렇게 불렀슴)를 울러메고, 산행복장 차림으로 동네 어귀를 나서면 주변사람들은 부러운듯 쳐다보곤 했다. 한편 동네사람들끼리 모이면 '누구는 어느 산에 다.. 2010. 5. 14.
내가 입었던 등산복(1970년대) 1970년대 초반에 입던 차림이다. 빡빡머리 시절을 마치고 처음 산을 찿기 시작했던 때였으니 ~ 흑백카메라 하나면 최고던 때지만 먹고 살기에 바빠 사진 찍을 여유조차 없던 시절이다. 부산 금정산 ~ 1970년대 중반의 옷차림이다. 이 때 큰맘 먹고 일제 미놀타 칼라 카메라를 장만했다. 근 2년동안 빌린돈 갚니라고 엄청 고생했지만 그 덕에 귀한 사진기록을 남겼다. 충남 금산 진악산 ~ 전북 진안 마이산 ~ 당시 지리산이나 설악산에서 조난사고가 가끔 발생했다. 산행 목적은 굶는 연습인데 혹시 내게 닥칠지도 모를 상황에 대비한 생존훈련을 했던 것이다. 수통엔 딸랑 물 1리터뿐, 그 외 다른 식량 없었다. 고헌산을 하산하면서 하늘이 노랗게 변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던 때다. 경남 언양 고헌산 ~ 물빠진 청바지에 .. 2010. 5. 14.
내가 사용했던 장비들(4) ~~ 암벽에 한참 열 올리던 시절, 야영 드는 일이 잦아 캠핑장비는 필수에 가까웠다. 따라서 무거운 암벽장비에 캠핑장비까지 합쳐 큰 배낭을 메고 다니는 일이 빈번했다. 암벽을 위해 야영 드는 날이면 무게와 한판 씨름을 벌이게 되는데, 준비물 중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배낭에서 빼고 무게나 부피를 줄이는데 총력을 다했다. 그리고 야영을 같이 할 멤버들에게도 사전에 의견을 절충해서 중복으로 장비를 챙기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무게와 부피 때문에 텐트는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취사도구나 침구류, 옷가지 등도 부피가 많이 나가서 배낭에 부담을 주었다. 그런 이유로 장비 선택에 각별히 신경을 썼고, 가벼우면서도 부피가 적게 나가는 소형경량을 찿아야했다. EPI 개스버너 (1983년) 1870년대 중반에 옵티무스(Optmu.. 2008. 9. 26.
내가 사용했던 장비들(3) ~~ 옛날에는 배낭을 대부분 '륙색'(Rucksack) 또는 '륙삭'이라고 불렀다. 부산 지방에서 '니꾸사꾸' 라고도 불렀는데 륙색이란 말이 일본식 발음으로 불려진게 아닐까로 추측된다. '배낭'이란 한자어로서 '背囊'이라 표기되고, 물건을 넣어서 등에 질 수 있도록 헝겊이나 가죽 따위로 만든 주머니로 풀이된다. 배낭이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간혹 친구들이나 가까운 이웃들이 빌려달라고도 했다. 격동기에 먹는데만 치중했던 시절, 취미나 문화생활이란 먼 나라의 사치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서 각 가정마다 가계수입도 늘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각종 취미와 문화생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이미 생활의 일부로 되어서, 아마 각 가정마다 등산배낭 한두 개쯤 없는 집은 없을 것.. 2008. 9. 25.
내가 사용했던 장비들(2) ~~ 내가 사용했던 암벽장비들 ~ 젊은 시절의 열정과 패기와 땀이 깊게 베인 물건들이다. 이것들~ 이젠 고물이 되었지만 생사를 함께 나눴던 숱한 사연이 여기에 얼룩져있다. 아마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암벽을 했던 바윗꾼이라면 이런 장비를 볼 때 특별한 감회를 느낄 것으로 여겨진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암벽장비가 그리 흔치 않았다. 청계5가나 남대문시장에 있는 몇 군데의 전문장비점을 찿아 나서야 구할 수가 있었다. 지금처럼 도봉산이나 북한산 입구, 아니면 동네 근처의 장비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환경조건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장비구입을 위해 별도의 시간을 준비해야했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아서 장기계획을 잡아 장비를 마련 했었다. 미군용 카라비너... 미군용 카라비너 ~ 1970년대 .. 2008. 9. 17.
내가 사용했던 장비들(1) ~~ 내가 신었던 등산화들 ~~ 뭐 그리 특별난 물건도 아니지만 그래도 정이 들었던지라 정리해서 나열해보았다. 1970년대에 처음은 운동화나 농구화를 신고 다니다가 나중엔 좀더 고급으로 군용 워커나 정글화를 신고 다녔다. 당시 신발 외에도 군용제품을 검게 물들여 산악용으로 쓰기도 했는데, 탄띠나 혁대, 수통, 반합, 대검, 도끼, 야전삽, A형 텐트 등을 도깨비시장에서 구입, 산악용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다가 경찰이나 헌병에게 걸리는 날이면 모두 몰수 당하기도 했다. 1970년대 말쯤에는 워킹용으로 나온 소가죽으로 만든 경등산화 '크레타슈즈'를 처음으로 보게 되어 구입해서 신고 다녔다. 크레타슈즈의 가격은 \25,000. 결코 만만한 가격이 아니었던만큼 이 신발을 신고서 뽀대나게 누비고 다녔다. 당시만해도 이것을.. 2008. 9. 17.
되찾은 수락산 사진 ... 옛날 사진 3장 ... 어찌 보면 북한산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도봉산같기도 운악산같기도 한데, 아니면 불곡산같기도 하고, 주변의 바위산을 아무리 떠올려봐도 사진 속의 지형을 아무리 짜 맞추어도 기억으로 재생되지 않았다. 어디서 촬영한 것인지 늘 궁금해 있던 것이다. 앨범을 열 때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뒤로 돌려 더듬었지만 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지난 여름에 결국 그 사진의 실마리를 찿아냈다. 더위를 피하러 수락산 폭포 물줄기를 따라 올랐다. 그 능선에서 몇 컷 촬영한 사진을 PC로 옮기다가 왠지 익숙했던 풍경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해서 앨범 속의 옛 사진을 꺼내 비교를 해 본 것인데, 지형이 서로 일치해서 수락산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옛 사진 1 2008,7,20 사진 1 옛 사진 2 20.. 2008. 9. 11.
비봉능선에서 ~ 산행일자는 불확실,옷차림으로 대략 1985년 전후쯤으로 추측. 사진으로 보아서 날씨는 쾌청했던 것같고, 누구랑 올랐던지는 기억에 없다. 문수봉을 배경으로... 당시는 비봉능선을 반으로 갈라서 토막 산행으로 올랐다.불광동이나 연신내쪽에서 북한산을 오르면 비봉 직전에서 하산해야 했던 것이다. 삼천사 계곡에 군부대가 있었고, 비봉 정상에 군초소가 있어서 군사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던 때이다. 1968년 청화대 습격을 위한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었다.그 후로 비봉, 인왕산, 안산, 우이령, 송추지역 등 여러 곳이 군사지역으로 묶였다.그러다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점차 군사지역에서 해제되면서 출입이 자유롭게 이루어진 것이다. 문수봉... 그 때는 비봉능선을 이렇게 올랐다.불광사에서 수리봉(.. 2008. 7. 25.
의상능선의 잊혀진 기억 ~ 북한산 ** 의상능선의 사진이 확실하다. 언제 촬영한 건지, 아무리 되새겨도 기억의 목록에 없으니, 연결된 사진이라도 있어야 감이나 잡아 볼 것인데, 요 사진 딸랑. 한 가닥 실마리로 남았지만, 새하얀 기억 속 끄트머리조차 잡을 수가 없구나. 사진 속 저 인물은 어딜 그리 뚫어지게 바라보는지 맞은 편 설산(雪山)도 무주공산(無主空山)이더라. 아아 ~ 옛날이여 ~ 멀리 두고 온 세월이여 ~ 잊혀진 기억 되찿아서 거꾸로 거스를까마는 ~ 2008. 7. 23.
의상능선의 희미한 기억 ~ 산행일자는 불확실, 추측컨데 1984년 전후쯤 ?? 날씨는 쾌청, 막내동생과 둘이서 올랐다. 눈이 꽤 쌓였던 연초의 겨울이다. 대서문 성곽을 따라서 의상능선으로 올랐던 것인데, 산성이 끝나는 지점부터 급경사 오름길로 바위를 거쳐 올라야 했다. 이 코스 중간에 전망 좋은 곳 2 군데가 있었다. 전망대에서 눈 덮인 북한산을 바라보면, 꼭 알프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후, 대서문 성곽으로 오르는 길은 출입금지로 묶여 폐쇄되었다. 지금처럼 계단이나 손잡이 등의 시설물이 없던 시절, 다소 위험한 코스로 알려져서 의상능선을 다녀오면 은근히 자랑하던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당시 북한산의 공룡능선이라는 별칭이 있기도 했다. 대부분 동계시즌을 이용해서 올랐는데, 눈이 쌓이고, 칼바람 몰아치.. 2008. 7. 19.
길매봉에서 청계산으로~ 1989년 4월23일날씨 : 맑고 따뜻했던 날 코스 : 청계저수지~ 복계폭포 갈림길~ 길매봉~ 길매재~ 청계산~ 길매골~ 청계저수지 인원 : 동생과 둘이서... 의정부 구터미널에서 일동까지 버스를 이용했다. 일동에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버스터미널 맞은 편으로 난, 차가 다닐 것같지 않은 뒷길로 진입하여 부대앞을 지나 청계저수지까지 가는 것이다. 일동터미널에서 청계저수지까지 약 4Km 거리의 비포장로인데 그야말로 먼지 천국의 오지였다. 하루에 두어 번이나 겨우 다닐 것같은 버스 종점에 닿았다. 구멍가게도 하나 보였다. 인적 없는 산골마을은 시간이 멈춘듯 조용했고, 우리는 그 정적을 깨며, 임도를 따라 산행길로 들었다. 밭 한가운데에는 다 쓰러져가는 폐가도 있었다. 슬며시 나타난 냇가도 임도를 따라가며 .. 2008. 7. 18.
관악산 팔봉의 추억 ~ 1987년 1월30일(금요일) 날씨 : 맑음 (영하6도) 코스 : 서울대 ~연주암~ 연주대~ 낙성대 인원 : 나홀로 1987년 1월31일(토요일) 날씨 : 맑음 (영하6도) 코스 : 낙성대~ 연주대~연주암~ 8봉릿지~ 무너미 고개~ 서울대 인원 : 동생과 둘이서 이틀 연속으로 관악산을 올랐다. 첫날은 서울대에서 출발하여 낙성대로 하산하고, 그 이튿날은 낙성대로 올라서 팔봉을 거쳐 서울대로 하산했다. 당시 팔봉은 관악산 유일의 릿지코스였다. 그래서 대부분 팔봉을 거치는 것으로 코스를 잡아서 올랐다. 후에 육봉능선이 개방되고서부터 육봉~ 팔봉을 연결하는 산행을 즐겼다. 연주암 고개에서 불성암쪽으로 전망대가 있었다. 여기서 안양쪽을 바라보면 팔봉의 여덟 봉우리가 손에 잡힐듯 보인다. 1봉에서 8봉쪽으로 점차 .. 2008. 7. 15.
소홀했던 관악산 ~ 관악산도 무척 좋은 산임에 틀림없다. 북한산, 도봉산의 유명세에 가려 우선 순위에서 밀리지만 '악'(岳)자가 들어간 이름만큼이나 산세가 아름답고, 수려한 경관을 지닌 산이다. 지난 이야기지만, 한 때는 관악산을 홀대하던 시절도 있었다. 암벽등반으로 대부분 도봉산, 북한산을 찿아 다녀서 관악산은 눈에 들지도 않았던 것이다. 암벽시즌을 벗어난 겨울철이나 되어서야 겨우 한두 번 올라보는데, 이 산의 특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던 것이다. 관악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다. 하지만 당시 관악산에는 암벽대상지가 없었다. 그래서 바윗꾼들이 관악산을 찿는데 아무래도 인색했던 것이다. 80년대 초반까지 거벽을 대상으로 하여 피치등반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80년대 초,중반에 '볼드링' 또는 '하드프리'라는 새로운 용어들.. 2008. 7. 11.
밤낚시, 그리고 삼악산 ~ 1984, 5, 27 춘천 삼악산 갔던 날. 날씨가 좋았슴, 인원은 5명 봉고 승합차 이용 하루 전날인 26일, 춘천으로 밤낚시를 떠났다. 점심을 훌쩍 넘겨서 의암호에 도착, 목 좋은 곳을 골라 부리나케 텐트로 별장을 만들고, 물 건너 맞은 편엔 밤섬, 그 뒤로 춘천시가지가 배경이 되어주었다. 낚시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1박 야영 후 삼악산 오를 것에 더 무게를 두었다. 어느 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황혼녁 호숫가의 특별한 분위기를 맞아 저녁식사를 가진다. 아우르는 술잔도 주거니 받거니 서로 권해가며, 낭만의 호수에서 '이 태백'의 밤이 되어보는 것이다. 취기가 오를 무렵 칠흑이 겉돌고, 여태 잠 실컷 자던 렌턴을 깨워 불 밝히고, 어둠을 물린다. 자~ 이젠 본격적인 밤낚시, 물가에 홀연히 앉아서.. 2008. 7. 10.
강촌의 아련한 추억 ~ 80년 가을 어느 날, 강촌으로 기차여행을 떠났다. 경춘선 완행열차로 출발점은 성북역, 도착은 강촌역. 기차바퀴 덜컹대는 소리,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들며, 웃고 즐기던 소리, 통기타를 퉁기며, 합창으로 따라 부르던 노래소리가 낭만이던 시절이다. 강가에 A형 텐트를 쳐놓고, 모래밭에 뺑 둘러 앉아서 단체로 게임도 즐기고, 가냘픈 카셋트 틀어놓고 막춤으로 즉석무대 만들어서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밤이면 모닥불 피우고, 불가에 둘러 앉아 도란도란 애기 나누며, 소주 한잔, 오징어 한 마리에 행복을 느끼던 시절이 있었다. 주고 받던 술잔으로 취기가 돌 때면, 모닥불 열기도 부족해서 한바탕 춤으로 젊은 열기를 한 껏 발산하고,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긴 밤을 지새노라면, 어느새 땀에 베인 머리카락엔 새벽이슬.. 2008. 7. 5.
불암산의 추억 ~ 1987년 2월15일 맑고 쾌청했던 날, 최저 영하 8도/ 최고 0도 산행코스 : 불암동 ~수영장~ 무명봉~ 대슬랩~ 사선침니~ 정상~ 석천암~ 불암사~ 불암동 담력훈련겸 단체산행으로 15명 참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불암사 입구에 매표소가 있었다. 일주문 앞 구멍가게에서 도로쪽 벽면에 봉창을 뚫어놓고, 여기서 요금(300원)을 징수했다. 처음 몇 번은 착실히 요금을 내고 이곳을 지났지만, 다른쪽 입구에서 입장료가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후 불암사 입구를 피하고, 입장료가 없는 무명봉쪽 코스를 선호해서 올라다녔다. 입장료를 내는 불암사 코스는 석천암까지 지루한 계단으로 이어져 단조로웠지만, 입장료 없는 무명봉 코스는 바위지대가 섞여있어 아기자기한데다가 스릴까지 적당히 가미된 곳이었다.. 2008. 7. 3.
수락산보다 불암산을 더 좋아했던 이유 ~ 불암산과 수락산은 결국 같은 산이라 생각한다. 북한산과 도봉산이 우이령을 사이에 두고, 서로 연결된 것처럼 불암산과 수락산도 덕능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같은 줄기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산은 다 똑같다.그러나 그 중에 마음을 더 두는 쪽이 아무래도 생기는 것이다. 북한산과 도봉산 중에서 북한산쪽을 더 선호했던 것처럼 수락산보다는 불암산 오르기를 더 좋아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위에 푹 빠져 있었을 당시 수락산엔 암장이 없었고, 불암산은 천보암을 비롯해서, 대슬랩, 정상부의 암벽 등 등반대상지를 소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히 불암산 쪽으로 마음이 쏠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해발 507m의 고도로 높지 않은 편, 하지만 동네 뒷산 정도로 볼 만큼 만만한 산도 아니다. 이만한 높이의 산 중에.. 2008. 7. 2.
불암산 가던길의 추억~ 실컷 올라본 불암산 ... 시원스런 바위마다, 능선마다, 발자국 손자국 때 묻어서 정겨운 산. 갖가지 추억으로 얼룩져서 아스라한 기억이 곳곳에 베인, 내겐 언제나 깊은 감흥을 주는 산이다. 서울역 남대문 앞에서 45번 버스를 타면 불암산 입구까지 1시간 걸렸다. 전철을 이용, 청량리에서 갈아타면 시.. 2008.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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