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여행/산길따라~

왕방지맥(칠봉산~해룡산~왕방산) .... 2011.09.13

by 마루금 2011. 9. 14.

산행날씨 : 18.7 ℃ ~ 29.9℃, 흐림과 맑음 반복 
산행코스 : 아차노리 ~ 아차노리 삼거리 ~ 매봉 ~ 칠봉산 ~ 헬기장 ~ 장림고개 ~ 삼시봉 ~ 임도 ~ 해룡산 ~ 오지재 ~ 왕방산 ~ 깊이울계곡 ~ 심곡저수지

산행거리 : 도상 18.4Km
산행시간 : 7시간(휴식 및 중식 1시간)
산행인원 : 자유팀 4명

교통편    : 대중교통으로.... 지행역(전철)  


중추절 연휴 중 다녀왔다.

추석을 거꾸로 세었는지 날씨가 더워서 꽤나 땀을 흘렸다.

대간길 산우들과 함께 한 산행이다. 동두천에서 시작, 양주 경계를 걸쳐 포천으로 넘어갔다.  

 

 

전철 지행역에서 하차,
들머리인 아차노리 안마을까지 택시를 이용했다.(요금 3,600원)

2Km가량 곧게 뻗은 지루한 아스팔트 도로를 걷기도 싫었지만 초장부터 맥을 빼고나면 나중에 힘들어서 ...

 

 

아차노리 마을의 오리집에서 하차, 우측의 밭 가장자리를 따라 조금 우회해 들어가서 능선으로 올라 붙었다. 희미하지만 등로가 구성되어 있고, 조금 오르면 철탑이 나타난다. 이어서 바위 위에 예쁘장하게 꾸며논 케언도 보이고 ...

 

 

 

산불감시초소를 지나서 우측 일연사에서 올라오는 능선과 합류, 이곳을 아차노리 갈림길이라 부른다. 이후 등로는 더욱 또렸해지고, 요소마다 이정표 설치가 확실해서 길을 놓칠 염려는 거의 없다. 등로가 비교적 순탄하고, 피톤치드 만땅인 숲길을 즐겁게 애기를 나누며 발길을 옮긴다.  

 

 

매봉 도착 ~
대도사 갈림길이기도 하다.

송내상회에서 진입하여 대도사로 오르면 이곳이다.

 

 

매봉에서부터 각 봉우리마다 봉우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안내문을 볼 수 있다. 이 산을 찿는 사람들을 위해 알기쉽게 풀이하여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예전 이런 안내문이 없었다.

 

 

 

첫 밧줄구간

 

 

 

칠봉정

삼거리로서 재생병원 갈림길이기도 하다. 전에 보지 못했던 사각정자인데 자재들이 깨끗한 걸로 보아 최근 설치한 것 같다.

 

 

칠봉정에서 바라본 국사봉

 

 

석봉에서는 돌보다도 나무가 더 그럴싸 하다. 노송 한 그루가 돌 위에 점잖게 뿌리를 내리고 앉았는데 모양새가 명품스럽다. 사진으로는 명품을 표현하기에 아무래도 부족한 것 같다.

 

 

 

 

 

등로와 MTB코스가 겹치기도 하고, 때로는 나눠지기도 한다. MTB코스가 걷기에는 편하지만 그래도 등로를 따라 오르는 것이 볼 게 더 많다. 봉우리마다 전망대가 나타나 훤히 트인 조망을 즐길 수 있고, 벼랑의 멋진 노송도 감상할 수 있다.

   

 

 

 

칠봉산은 단풍으로 물든 풍광이 '비단병풍'같다해서 금병산(錦屛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때 세조가 말년에 이 산을 올라 수렵했다는 기록에서 어등산(於等山) 이라는 이름도 남겨져 있다. 양주군지에는 발치봉, 응봉, 깃대봉, 투구봉, 솔치봉, 돌봉, 석봉 등 7개의 봉우리 로 이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등산(於登山)이란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 행정지명으로 첫 기록이 있고, 어등산이란 산이름으로 사용된 경우는 동국여도(1801∼1822)와 대동여지도(1861)에서 확인된다. 한자표기로 ‘어등산(於等山)’ 이나 ‘ 어등산(御登山)’으로 쓰이기도 했다. 어등산이 있는 어등산면은 여러 문헌에서 그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 여지도서(1757), 해동지도(1760), 팔도군현지도(1767∼1776), 호구총수(1789), 청구도(1834), 양주목읍지(1842), 대동지지(1864), 양주목읍지(1871),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 1888), 양주군읍지(1899), 양주읍지(1899),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1912) 등에서 확인된다. 어등산 이름에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많은 신하를 참형에 처한 것을 후회하여 사찰을 찾아다니다가 탑동에 위치한 상봉(上峰)을 국사봉으로 정하고, 이 산을 지나갔다해서 어등산(御登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는 세조가 이 산에서 내촌(內村) 마을을 보고 신하들에게 저 마을은 무슨 마을이냐고 물으니 신하들이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에 세조가 “앞에는 산이 있고 회암천(檜岩川)이 흐르는데다가 뒤에 또 산이 있으니 안말 이겠군” 이라고 한 후 ‘안골’로 불리다가, 구한말에 이르러 내촌(內村)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임금이 이곳으로 직접 왔을리가 없다 하여 어등산(於等山)으로 억지 개명하려하였는데, 마을 원로들이 반발하여 산봉우리가 일곱개라 칠봉산(七峰山)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해서 칠봉산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정상석이 없던 시절의 비닐코팅지

 

예전의 정상목

 

칠봉산(七峰山)

내촌에서 보았을 때, 7개 봉우리로 보인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주시 봉양리와 동두천시 탑동, 송내동 경계에 걸친 높이 506.1m의 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어등산(於等山)으로 불렸으며, 구한말 전후로 칠봉산이란 이름으로 불렀다.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나무 사이로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있다하여 금병산(錦屛山)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근처 주민들은 칠봉산을 천보산(天寶山)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천보산이란 이름으로 15세기 초반 태종실록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동여비고(1682),  해동지도(1760),  여지도서(1757∼1765), 팔도군현지도(1767∼1776)·동국여도(1801∼1822), 양주목읍지(1842), 동국여지지(19C중엽), 대동여지도(1861), 대동지지(1864), 양주목읍지(1871), 조선지지략(朝鮮地誌略, 1888), 양주군읍지(1899), 양주읍지(1899),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 신편조선지지(新編朝鮮地誌, 1924), 조선환여승람(1937)에서 확인된다. 태종실록2년(1402) 6월25일조에 천보산에서 두 개의 돌이 무너졌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천보산이라는 이름이 총 7건 확인되는데, 태종과 세조대에 임금이 이곳에서 사냥 혹은 사냥구경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이것은 바로 ‘어등산(御登山)’의 어원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1861)에는 회천읍 이외에도 양주읍에 또 하나의 천보산을 표기하고 있어서 근처 주민들을 혼란케 하고있다. 위에 열거한 문헌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천보산은 읍치에서 동쪽으로 25∼30리 되는 포천과의 경계지점에 있고, 회암사가 자리 잡은 곳에 있다고 하였다.  결국 대동여지도를 제외한 조선시대의 문헌에 수록된 천보산은 회천읍 봉양리의 천보산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와 더불어 양주읍 마전리에도 또하나의 천보산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봉양리의 어등산과 천보산은 칠봉산에 속한 봉우리를 가리킨 것으로 보여진다.

 

 

< 칠봉산 일곱 봉우리의 이름 유래 >

 

발리봉(發離峯) 
조골 북쪽 칠봉산 서쪽 끝에 있는 봉우리이다. 임금께서 처음 등산하여 떠난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봉우리가 소잔등에 붙은 파리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하나 이는 와전인
듯 싶다. 파리봉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응봉/매봉(鷹峯)
조골 북쪽에 있는 칠봉산의 한 봉우리이다.    임금이 수렵할 때마다 사냥에 필요한 매를 날렸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
다.

 

깃대봉/기대봉(旗臺峯)
한자로 기대봉(旗臺峰)이라고쓴다. 임금이 수렵하는 곳이라는 표시깃발을 꽂았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곳에서 임금이 전사들을 불렀다하여 아래에 소군곡(召軍谷)이란 지명이 생겼다

 

투구봉(鬪具峯)
내촌 북쪽 칠봉산에 있는 한 봉우리이다.    투구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임금이 이곳에서 쉬
니 시위군사(侍衛軍士)가 갑옷투구를 풀어놓았다고 한다.    

 

솔리봉(率離峯)
내촌동 북쪽에 있는 칠봉산의 한 봉우리이다. 수리가 있는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것으로, 수라봉이나 수리봉이란 이름도 가지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준비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돌봉(突峯)
칠봉산 봉우리가운데 하나이다. 임금이 이곳을 떠나며 이곳에 돌이 많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는 석봉(石峯)이라고 불러야하나 이미 칠봉산 안에 석봉이 있으므로 돌봉이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석봉(石峯)
사괴 북쪽에 있는 칠봉산의 한 봉우리이다. 임금이 등산을 하다가 돌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외 작은 봉우리로 갈미봉, 된봉, 수리봉, 말봉 등이 있다. 칠봉산내에 소군곡(召軍谷), 무자곡(茂子谷), 청풍동(淸風洞). 사슴골, 두령골, 학막골, 족두리바위.    마당바위, 농바위, 가마바위, 장수바위 등이 있다.

 

 

도봉산 방향 

 

솔리봉 

 

 

 

▼ 장림고개 

천보산과 칠봉산 사이에 걸친 고개로서 양주시와 동두천시의 경계상에 놓여있다.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와 동두천시 탑동을 연결하는 347번 지방도의 구도로이다. 신도로는 이곳 아래로 터널을 뚫어서 이용되고 있다. 고개턱에는 전에 없던 가옥이 자리잡고 있었다.   

 

 

종전의 장림고개 

 

 

 

삼시봉(三市峰)

동두천시, 양주시, 포천시의 접경지가 된다. 정상에는 이정표뿐이며, 3개 시가 만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는 곳이다. 능선분기봉으로서 남쪽은 천보산, 북서쪽은 칠봉산, 북동쪽은 해룡산으로 능선이 세 갈래로 나뉘어진다.

 

 

삼시봉(三市峰)에서 좌측으로 270도 가량 방향을 홱~ 틀어서 한동안 MTB 도로를 따라간다. 잣나무와 낙엽송 짙은 숲길을 기분좋게 걷노라면 어느새 해룡산 들머리다. 여기서 차가 다닐만한 임도를 만나는데 곧바로 헤어진다.

 

 

 

비지땀을 흘리면서 급사면을 올라 정상부근에 도착하면 군부대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는다. 해룡산의 실질적 정상을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으므로 옆으로 우회해야 한다. 정상석은 없지만 비닐표지와 안내문이 그 역활을 대신하고 있다.  

 

 

 

 

海龍山(661m)
포천읍 설운리 해룡부락 서북쪽에 위치한 산이다.
정상은 군부대가 있어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다. 천보지맥의 한 봉우리로 의정부 북부의 천보산 끝자락인 미군부대에서부터 시작, 축석령 부근에서 한북정맥과 만났다가 교차 하고는 포천방향으로 북진 하여, 어하고개를지나 회암사지가 바라뵈는 회암령을 거쳐 해룡산에 이른다. 해룡산에서 다시 왕방산(734m), 국사봉(745m), 소요산(532m), 종현산(589m)으로 뻗어 한탄강과 합류하는 영평천에서 그 맥을 끊는다.

 

해룡산 이름은 <조선왕조실록><견성지><동여도><포천고읍지도><경도도-천하여지도책><세종실록지리지><청구도><대동여지지><포천읍지><조선전도><해동도-경기첩><여지도-경기첩><해동여지도-경기첩><동국여지승람><경기37관도><해좌승람><동람도><경기고지도첩><조선지지자료><대동여지도><해동지도첩> 등여러 군데에서 그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해룡산에는 감지(鑑池)가 있는데, 가뭄에 비를 빌면 가끔 효험이 있다. 옆에 해룡사가 있으니 산이름도 그 절이름에 유래한다.속설에 전하기를 군마(郡馬)가 있어 산 위를 짓밟고 다니면 비가 오거나 오지 않더라도 날씨가 음침해진다고 한다. 그 북쪽 왕방산과 함께 강무장(講武場)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포천읍지>에는 ‘해룡산은 군 서남쪽 20리에 주엽산이 뻗어온 내맥에 있는데, 위에는 감지못이 있다. 혹 천호라고 부르는데, 비 오기를 빌면 효험이 있다. 속세에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사람과 말이 못 주위를 짓밟으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하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 태조가 즉위한 후에 이 산 밑에서 강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견성지>에는 '해룡산은 현 서쪽 20리에 있다. 왕방산 남쪽 위에 감지가 있는데, 달리 천호(天湖-하늘샘)라고도 부른다. 비오기를 기원하면 효험이 있다.세상에 전하기를, 사람과 말이 이 연못 옆을 달리거나 뛰면 비가 안 오며 그늘진다고 한다. 지금은 연못이 없어져버렸다. 태조임금이 즉위한 후, 이 산에서 무술을 익혔다’ 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거기 재벽동(滓洞)에 태조 잠저시(潛邸時)의 전장(田莊)이 있다’는 기록에 이어  '그 자리가 포천 서쪽 20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방향과 거리가 포천에서 왕방산 너머인 탑동(塔洞)  '왕방이’ 마을과 일치한다. '왕방이' 지명은 수백 년 전부터 있어온 이름이며, 지형도에도 나타나있는 지명이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경기도 포천현에 ‘포천 고을 남쪽 20리에 해룡산이 있다.(在縣西南二十里海龍山)’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범우고>와 <포천조><견성지>에는 ‘해룡산 정상의 거울같은 연못(감지) 옆에 안국사라고 불리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되었다(在海龍山鑑池榜或稱安國寺今廢)’라고 하였다.  해룡산에는 옛 절터가 2개 있었다 하는데 그 하나가 해룡사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고, 다른 하나는 현재 밭으로 변하였으나 폐정된 우물이 있을 뿐인 안국사터가 있다. 안국사터 근방에 ‘어수정’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전술한 폐정이 바로 이성계가 마셨다고 <견성지>에 전해지고 있는 어수정으로 추정된다.

 

 

 

해룡산에서 만난 어느 홀로산객의 도움으로 모처럼 일행 4명이 사진 한 장에 단체로 담겨졌다, 이후 그 분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고, 오지재까지 잠시 동행이 되었다. 현재 동두천 시계 5산 종주 중이라 말씀하신다.

 

부대 정문앞 도로의 그늘진 코너부분에 머물러 점심식사를 가졌다. 라면과 김치의 산상 특급요리를 만끽하고서 홀로산객의 소주 제공으로 취기가 돋구어졌다. 점심을 마친 후 세멘트길을 따라 아래로 내려섰다. 중간쯤에서 임도와 합류되고, 곧 포장도로인 오지재에 도착한다.

 

 

 

 

 

해룡산의 기우재  

 

어느 때 용이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돌 서덜에 구불구불 누웠던가  
큰 물에 재가 날던 날이요

마고선녀가 바다에서 나오던 해일세  
구름 속에서 날고 싶으나 날개가 작고

거친 들녘 바람과 연기 속에서 늙어버렸네 
큰 가뭄에 단 비를 내리게 하니

고을 사람들은 희생제물을 극진하게 올리네

 

봉래 양사언의 詩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오지재

 

왕방산 들머리

 

또 한번 급사면을 올라야 했다. 오지재에서 돌탑이 있는 왕방산 남봉까지 ~ 알콜기운으로 다리 힘이 쏘~옥 빠진채 힘들게 올랐다.

 

 

포천 시내

 

 

< 왕방산의 유래 >

왕과 관련된 세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872년경  도선국사가 이 산에 머물면서 정읍을 닦고 있을 때, 신라의 헌강왕이 친히 행차하여 도선을 격려했다해서 왕방산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고 ...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오던 도중, 왕자들의 골육상쟁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왕방사에 며칠 동안 방문, 체류하였다하여 왕방산이라 했다는 설이다.

 

포천 이동교리에 용상동(龍翔洞)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성계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여기서 하룻밤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위의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이었음을 잘 알려 주고 있다. 고려말에는 목은 이색이 세속을 떠나 이 산중에 들어와 삼신암이란 암자를 짓고 은신했다하여 국사봉이라 했는데, 왕이 항상 목은 선생을 생각하며 이 산을 바라봤다 하여 왕망산으로 부른 것이 왕방산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 왕방산의 동굴 >

이 산 남쪽 선단리 기슭에 철종대왕의 생부 전계대원군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으며,  산 중턱에 박쥐굴이라는 자연동굴이 있으나 그 길이를 알 수 없다 한다. 표면에서 보기에는 높이 1m, 폭 2m의 굴이 좌우로 쌍갈래졌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점에서 다시 수직으로 뚫려있는 지점으로 돌을 던지면 물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날 정도라 한다. 3.1운동과  6.25 당시에는 피난처로 이용되기도했다 한다.

 

< 왕방산의 지맥 >

왕방산(737m)은 포천읍 남쪽 선단리에서 기봉하여 북쪽으로 뻗어내려 어룡리에서 주봉을 이루었다가 다시 뻗어 신북면 심곡리에 이르러 국사봉 등의 연봉을 이루며 장장 20여 리에 걸친 맥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천보산맥의 한 봉우리로 의정부 북부역 천보산 끝자락인 미군부대에서 부터 시작, 축석령 부근에서 한북정맥과 만났다가 교차 하고는 포천방향으로 북진하다가, 회암사지가 바라뵈는 회암령을 거쳐 해룡산(661m), 왕방산, 국사봉(745m),  소요산(532m), 종현산(589m)까지 이어지다가 한탄강과 합류하는 영평천에에서 그 맥을 끊는다.


< 왕방산의 인근 마을 >

호병동(虎甁洞 :호병골)

동네 전체의 모습이 호리병같이 생겼다는 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됨. 장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왕방산으로 오르는 길목에서 마을의 지형이 병(甁)의 형태를 띠고있어 회병(廻甁)골이라 불려다가 변음되어 호병(虎甁 또는 戶甁)골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측한다.

 

원적골(원적굴)

호병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예로부터 사람들이 소풍으로 많이 찿던 곳이라 한다. '원족'은 일본어로 소풍이라는 뜻인데 일제 때 생긴 이름으로 추정된다.

 

심곡리(深谷里)
본래 포천군 외북면의 지역인데, 깊은 골짜기라하여 깊이울(짚이울),
한자로는 심곡(深谷)이라 했다.

 

어룡리(魚龍里)

본래 포천군 서면(포천읍) 지역으로서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라하여 오룡골 또는 어룡동, 어룡이라 불렀다. 마을 뒤편으로 조득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왕방산에서 내려다보면 위쪽으로는 용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냇물이 흘러 물고기가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 있는 잉어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갔다고하여 마을 이름을 어룡리라 하게 되었다 하며, 용이 하늘로 오를 수 있도록 조득산의 용머리 부분이 무겁지 않게 지금껏 나무를 심지 않아 황무지인 채로 남겨 두었다고 한다.

 

심곡산(深谷山)을 지금은 국사봉(國師峰, 754m)이라 부른다. 포천 신북면 심곡리에서 남서쪽으로 보이는 산이 심곡산(국사봉)인데 왕방산 북쪽에 연봉으로 이어져있다. 심곡산 정상에서 북쪽으로는 왕방지맥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소요지맥으로 연결되며,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국사봉을 대동여지도에는 심곡산(深谷山)으로 기록하고있다. 이 산 높이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왕방산의 한 봉우리쯤으로 여기기쉬운데, 왕방산보다는 16.8m나 더 높다. '조선 태조가 국수를 자셨다는 산'이라 해서 국수봉이라 부른 것을 지금의 국사봉이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근거가 명확치 않다.

 

왕방산 북쪽 기슭과 국사봉 사이의 깊은 골짜기를 '깊이울 계곡'이라 부르며, 한자 표기로 심곡(深谷)이란 지명이 된다. 이 계곡 하부에 심곡저수지가 있으며, 그 유역 일대의 농업용수로 사용되어 전천후 전답에 기여하고 있다. 울창한 천연수림과 짙은 녹색의 잣나무 숲, 호수 물 속에 잠긴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 왕방산의 표기 >

왕방산의 올바른 표기는... ???

신라 헌강왕과 태조 이성계에 얽힌 내용의 사찰은 '王方寺'라 하였다, 따라서 이 산을 '王方山'으로 표기해야 옳을 것이다.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旺方山'(일제 때 王자 앞에 日자를 덧 붙여서 표기 했다고 함)으로 표기 되었으며, 몇해 전만해도 왕방산 정상석에는 '王訪山'으로 음각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상석 표기가 올바르게 돌아온 것이다. 이번에 그걸 확인하게 되었다. 퍽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종전의 잘못 표기된 정상석

 

 

 

 

 

 

 

 

심곡저수지를 지나서 산행은 끝이나고 . . . 

마을로 내려섰다. 어느 오리집에 들러서 오리고기로 포식을 하면서 . . . 

먼길 걸어 수고한 육체를 달랬다. 몸이 천만근이라 무겁고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날아갈 듯 가볍다. 

 

 

 

 

728x90
728x90

댓글